■ 서설
모든 어둠과 중생을 구제하여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신 스승님께 경의를 표하며, 이제 대법장론(對法藏論)을 설하겠습니다.
이 논을 작성함에 있어, 스승님의 고귀한 덕을 찬양하고 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본송에서] '모든'이라는 표현은 부처님을 지칭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지를 깨뜨리셨기에 '어둠을 멸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일체종의 어둠과 온갖 어둠을 멸하셨다'는 것은 모든 경계의 어둠과 일체 품류의 어둠을 없애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무지는 진실을 가리고 참된 견해를 방해하기 때문에 '어둠'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모든 경계의 어둠과 종류의 어둠에 대한 영원한 대치법을 증득하셨기에 '멸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문과 독각이 모든 어둠을 멸하였더라도, 그들은 염오무지만을 끊었기 때문에 일체종의 어둠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불법에 대한 깊은 이해와 다양한 차별을 아직 끊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이타적 덕에 대해서도 찬양해야 합니다. [본송에서] '중생을 건져 올려 생사의 늪에서 나오게 하셨다'는 말씀은 중생들이 빠져 있는 생사의 고통이 매우 깊고 어려운 곳임을 비유한 것입니다. 중생들이 그곳에 빠져 있어도 구제하는 이가 없기에, 부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 맞는 가르침을 주어 구제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에 대해 찬양한 후, 이제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본송에서] '이와 같은 참다운 스승께 공경 예배하리라'는 말씀은 그 분의 발에 머리를 조아리며 경의를 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리와 이타의 덕을 갖춘 분들이기에 '이와 같은'이라고 표현하였으며, 참된 가르침을 통해 중생을 구제하신 분을 '여리사(如理師)' 즉 참다운 스승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이타의 덕을 나타내며, 중생을 생사의 늪에서 건져 올리기 위해 방편으로 올바른 가르침을 설하신 분을 의미합니다.
참다운 스승께 예배한 후,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나는 이제 마땅히 대법장론(對法藏論)을 설하리라.' 이는 학도들을 가르치고 타이르는 것이기에 '논(論, astra)'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그러한 논은 대법장(對法藏)입니다. 대법장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혜(淨慧)와 이에 따르는 행(隨行)을 대법이라 하며, 이를 획득하게 하는 모든 혜와 논도 대법이라 합니다.
'혜'란 택법(擇法)을 의미하며, '정'은 무루(無漏)를 뜻합니다. 이러한 정혜의 권속을 '이에 따르는 행, 즉 수행(隨行)'이라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무루의 5온(蘊)을 설하여 '대법'이라 이름하니, 이는 승의(勝義)의 아비달마(阿毘達磨)입니다.
세속의 아비달마에 대해 말하자면, 무루의 5온을 획득하게 하는 모든 혜와 논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혜'는 이를 획득하게 하는 유루(有漏)의 문(聞)·사(思)·수혜(修慧)와 생득혜(生得慧), 그리고 이에 따르는 행(行)을 의미하며, '논'은 무루의 혜를 낳게 하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혜와 논도 무루 정혜를 낳게 하는 자량이 되기 때문에 아비달마라고 이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비달마의 명칭을 해석함에 있어 자상(自相)을 보존하는 것을 법(法)이라 하며, 만약 그것이 승의의 법이라면 오로지 열반(涅槃)을 말하지만, 법상(法相)의 법일 경우 4성제(聖諦)와 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승의의 법인 열반에 대향하고 법상의 법인 4성제를 대관하기 때문에 '대법'이라 일컫게 된 것입니다.
대법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논을 '대법장(對法藏)'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는가? 게송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대법)의 승의를 포섭하고 그것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대법구사(對法俱舍)라는 명칭이 설정된 것입니다.
이러한 대법론(對法論) 중의 승의가 이 논 중에 포섭되어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장(藏, kosa)'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혹은 이 논은 그것에 근거하고 그것으로부터 이끌어져 나온 것으로, 바로 그것의 내용을 갈무리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장'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논을 '대법장(즉 아비달마구사, Abhidharma ko a)'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비달마를 설하게 되었으며, 누가 처음 아비달마를 설하였기에 지금 이 논을 지으면서 경의를 표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온갖 번뇌를 소멸할 수 있는 뛰어난 방편으로, 택법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으니, 번뇌로 인해 세간은 존재의 바다를 떠도는 것, 이로 인해 부처님은 대법을 설하셨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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